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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진실

  • 기자명 여수시 홍보담당관 (navvv33@korea.kr)
  • 조회수 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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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발자취를 따라

4월의 제주는 아름답다.

푸른 언덕 끝에는 어김없이 파란 바다와 하늘이 펼쳐지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들은 바람에 흔들린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이 좋은 세상에서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제주의 아픈 역사를 굳이 기억하려는 이는 많지 않다.

서귀포시의 초청으로 23일간의 43역사 알리기 팸투어를 마쳤다.

43 해설사님의 말이 깊은 울림을 남겼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반 복 된 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제주 4·3 사건은 좌우 이념갈등 속에서 194843일부터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무려 6년이 넘는 긴 세월이다.

당시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없고 미군정만이 존재했다. 미소 냉전이 시작되고 극심한 이념갈등의 시대였다. 일장기가 내려지자 그 자리를 차지한 미군이 친일파들을 등용하면서 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미군정의 강경탄압정책, 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우익단체)의 억압과 횡포가 극에 달했다.

분단 과정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노선에 동조하는 제주의 분위기가 탄압을 더욱 부추겼다.

사건의 발단은 194731절 가두시위에서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며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도화선이 되었다.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는커녕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당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제주도민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도민의 분노는 10일 후 민관 총파업으로 나타났고, 미군정은 제주섬을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고 194843 발발 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잡아들였다. 3.3평의 작은 유치장에 35명을 가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던 중 194843, 남로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9485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미군정이 실시한 510선거를 거부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이후 강경 진압작전을 펼쳤으나 623 재선거도 실패하자 미군정에게 제주도는 눈엣가시 같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신생 이승만 정부도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제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43의 대량 학살극은 1017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포하면서 예고됐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계획을 채택한 것이다. 마을은 불탔고 주민들은 잔혹하게 죽어갔다.

같은 해 1019일 제주도에 파병명령을 받는 여수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동포를 죽일 수 없다고 반대하며 총부리를 돌려 일어난 것이 바로 여순사건인 것이다.

 

1948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한라산에서 내려온 하산민 8천여 명 을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2,530명을 현장에서 총살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냈다.

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더 큰 비극이 이어졌다. 북한군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남하하던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빨갱이를 모조리 처단하자는 뜻이었을까?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수형자들 3천여 명은 정치범이란 이유로 불법 처형됐다.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범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다시 끌려온 사람들은 바다에서 수장 학살되거나 제주비행장에 총살 암매장되었다.

 

모슬포에 있는 백조일손지지(伯祖一孫之地)’는 대표적인 예비검속 사망자들의 집단 매장지다.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도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가슴 아픈 역사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14,471위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다.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표석도 4천여기가 세워져 있다.

 

최근 제주4.3희생자들에 대한 국가보상금 지급 기준이 마련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후 22년만이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동안 자행됐던 국가의 학살은 70여 년이 지나서야 희생자들에게 물리적인 사과를 하게 됐다.

너무도 기쁘지만 너무도 늦었다.

정부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폭력

하지만 반세기 가까이 연좌죄와 국가보안법의 굴레 속에서 침묵해야 했다.

가족을 모두 잃고도 오로지 가슴에 묻고 살아야만했던 유가족의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제주 4.3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 나에게 제주는 힐링할 수 있는 섬이었다.

2022년의 제주는 나에게 말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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