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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읍 군내리로 떠나는 조선시대 역사문화 탐방 : 방답진 선소

  • 기자명 최설민 (musul@naver.com)
  • 조회수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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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상 입추(7)가 지나서 그런지 요즘 하늘만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높고, 투명하고, 파란 하늘... 거기에 구름까지 떠 있는 화태대교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전에도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확산으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이 답답해지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로 조선시대 역사문화 탐방을 떠납니다.

군내리라는 마을의 이름은 1896년 돌산도를 중심으로 한 섬 지역이 돌산군이 되면서 군청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현재의 군내리는 여수시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돌산읍 소재지이며 돌산항은 남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돌산대교에서 30여분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돌산읍 군내리 서외마을에 있는 방답진 선소 굴강입니다.

방답진 선소는 이름처럼 조선시대 중종 18년 방답첨사진을 설치한 조선 수군이 배를 만들던 유적인데요. 마을 안쪽에 둥그런 타원을 이루는 굴강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습니다,

바다와 이어진 굴강에서 임진왜란 당시 좌수영이 보유한 거북선 3척 중 한척을 이곳에서 만들고, 또 대피하고, 수리하던 곳입니다.

굴강은 천연그대로의 지형을 이용하여 물길을 만들어 배를 숨기고 썰물 시에도 출동이 가능하게 하였던 곳으로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이 굴강을 갱 안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요.

여전히 굴강은 마을사람들의 선박을 파도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품고 있는 풍경을 보여줍니다.

방답진(防踏鎭)은 전라좌도수군절도영에 속해있던 군사시설이었는데요.

1522(중종17)에 설치되어 1895(고종32)에 폐진 될 때가지 무려 370년 동안 존속했다고 합니다.

돌산도가 외적이 침범하는 길목이어서 이곳에 첨사를 책임자로 하여 돌로 성을 쌓았는데요.

조선시대 왜구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전라좌수영의 전초 기지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방답진 산성이 있던 자리는 밭이나 민가가 들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곳곳에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어 방답진 성의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방답진 성문의 흔적은 총 3곳인데 동문은 돌산초등학교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에 있고, 돌산교회 뒷산 중턱에서 내려오는 도로 길목에 서문터가 남아 있으며, 서문터에서 남쪽 바닷가로 가면 있는 남문상회에는 당시 방답진 성 남문의 주춧돌이 남아 있습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의하면 방답진에는 전선 2, 병선 2, 협선 4, 군관 50, 기패관 25, 진무 45, 지인 25, 군노 25, 기수 50, 사령 25, 사생 50, 화포장 22, 포수 68, 사공이병 18, 승노군 302명 등 전선 8척과 수군 장졸 70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데요. 기록처럼 상당히 큰 규모의 수군기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답진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이름이 같은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 첨사가 방답진의 병사를 이끌며 큰 공을 세운 구국의 성지인데요.

지금도 마을 여러 곳의 지명이 방답진 성과 관계가 깊은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동내마을은 방답진의 동문 안에 있는 마을이며 남외마을은 영남루라는 현판이 걸렸던 남문 밖의 마을이고, 서외마을은 방답진 거북선이 정박하던 굴강이 있던 마을로 서문 밖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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