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을 걸어갑니다.
가을바람 살랑살랑 불어대는 향기로운 농촌 길을 걸어갑니다.
일제히 노란 옷을 갈아입고 즐비하게 늘어선 다랭이 논들이 거대한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아 황홀합니다. 그 곁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벼 익어가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립니다. 떠날 때를 알고 있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서럽게 들립니다.
유난히 길었던 긴 장마와 태풍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낸 아픔이 저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애잔해집니다. 일상에 지쳐 빈곤해진 마음도 자연의 풍요로움에 저절로 푸근해집니다.
가을이 되면 교과서에 수록돼 사춘기 감성으로 읊조렸던 릴케의 '가을날'이 떠오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 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 릴케 '가을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