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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그 현장을 찾아서

  • 기자명 이선심 기자 (ssl0357@hanmail.net)
  • 조회수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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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65일부터 여수 지역사회연구소 '남도학' 프로그램으로 여순사건을 다루었다.

관심있는 많은 시민들이 신청해 수강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신청자들이 무더위도 잊은 채, 진지하게 열정을 쏟아 냈다.

열정이 강한 만큼 질문 또한 너무 많아 수업시간이 끝나고도 약 1시간 정도는 길어지곤 했다.

때문에 오후7시에 시작한 수업이 10시가 넘어 끝나곤 했다. 

토요일이면 현장 답사를 했다.

여수 14연대인 신월동을 처음 답사 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쫓아보면 좌익도 우익도 모두 우리 민족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건만, 그 현장의 가운데 민간인의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왜 절차나 법적인 근거도 없이 죽어가야만 했는지 깊이 알아 갈수록 가슴만 답답했다.

반쪽만 나라를 새우려는 권력을 탐하는 자들과 한반도를 하나로 나라를 세우려는 자들의 부딪침에 죄없는 민간인들만 학살또는 희생자가 되어야 했는지...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도져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조상님들께 동등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 희망은 말할 수 없는 꿈이고, 희망이였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어떤 손길도 없었을 것이다.

원인을 제공한 일본과 미국에 아부한 그들의 죄를 고스란이 그간 헐벗고 굶주린 민간인들이 손가락질 하나에 또는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시신마져도 한 구덩이에 쏟아 버리고, 덮어버려 찾을 수도 없게 하고...

그 억울함을 아직도 위로 하지 못하고, 그 가족들 마저도 쉬쉬하며 대를 이어 말하기 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게 바로 여순사건이었다.

만성리 형제묘비에 세겨진 '. . . . .' 은 더욱 가슴 먹먹함을 말해 주었다.

형제묘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기 섬 엄마 섬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려 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중앙초등학교의 잘라버린 버드나무 밑둥은 역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초, 동초, 여수의 모든 초등학교는 바로 여순사건의 현장이었다.

우린 여지껏 아무것도 모르고 그 학교를 다녔고, 여순사건이란 단어조차 모르고 지내 왔던 그곳들이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구나 생각하니 더욱 아픔이 느껴졌다.

다음주 또 그 다음주 여순사건 현장 방문 시 내리쬐는 불볕 더위도 우리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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