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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독립유공자를 아십니까?

  • 기자명 홍보담당관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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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다 알고, 주재년은 아무도 몰랐다.”

최근 여수시청 앞을 지나는 여수시민 10명(10대~60대 각 2명씩)에게 ‘독립유공자인 주재년 열사를 아느냐?’고 설문한 결과다.

그렇다면, 여수지역 독립유공자 중에 한명이라도 아는가? 역시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그 만큼 알려지지도 알리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죄송스럽지 않은가?
우리가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8.15광복절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순국선열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기보다는 그날이 평일인지 휴일인지에 관심이 더 크다. 이번 광복절은 월요일이다.


여수시,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일컷는 말이다.
최근 여수시가 독립유공자 훈장전시대를 설치하고 발굴한 독립유공자를 추서하는 등 주재년 열사를 비롯한 이 지역 독립유공자 선양사업계획을 수립,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순직한 주재년 열사(1929∼1944)의 생가(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를 3억 3천 만원의 예산을 들여 오는 12월까지 복원할 예정이다.

주 열사는 지난 1943년, 15살의 나이로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목화밭 담장 밑 큰 돌 4개에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 일본은 패망한다, 조선 만세, 조선의 빛”이라고 새긴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1944년 1월경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4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러나 그는 복역 도중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석방 후 한 달여 만에 순국했다.

주 지사의 항일운동은 주민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그의 후손들이 관련 자료를 찾아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시는 지난 2006년 4월 주재년 열사에 대해 정부포상을 신청해 같은 해 8월 독립유공자로 추서됐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여수지역 독립유공자, 또 어떤 분들이 있나?

시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후손이 없는 유공자 4분에 대해 훈장전시대를 시청현관 옆에 설치, 그 애국정신을 기린다. 네 분은 다음과 같다.

정기채 [鄭基采, 1880~1909.8.30]
여수시 율촌면 출신의 한말의 항일의병.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여수·순천·광양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09년 일본헌병대의 총에 순국하였다.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형영 [李亨永, 1896.7.4~1923.2.5]
여수시 서정 출생. 1919년 3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 전습소 1학년에 재학할 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윤형숙 [尹亨淑, 1900.9.13~1950.9.28]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출생. 1919년 3월 10일 광주(光州)에서 거행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헌병에 의하여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팔이 잘린 그녀는 잠시 쓰러졌다 일어나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쳤고,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이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2004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성택 [金聖澤, 1898.3.1~1944.3.2]  
여수시 삼산면 초도 출생.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기관 폭파를 계획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와 함께 새로이 5분에 대해 추서를 신청해 김초암 열사의 추서가 결정되었으며 김경택, 김민석, 최석규, 이효동 등 4분에 대해서는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발굴조사중인 독립유공자도 2분이 있다.
될 김초암 열사를 제외한 보류됐다.

오는 15일 새로이 추서가 결정된 故 김초암 선생은 일찍부터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청년이었다. 그는 1942년 5월 30일 다니던 공장 기숙사 사감이 징병제도에 대한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화춘대남 이라는 가명으로 “아! 하늘이시어 우리 조선 민족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일본과 합병된 이래 30년간 대화민족(일본)은 조선 청년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징병검사에 합격하여 징병된다면 전장에서 대화민족(일본군)을 한 사람씩 사살 할 것이다.” 라고 작성,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징병제도를 비판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이후 병환중인 부친을 대신해 공성정미소(1960년 폐쇄)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하다 1958년 7월 감전사고로 사망했다.

이밖에도 여수의 류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 열사는 지난해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는 등 일제치하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3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올해 처음 실시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신청도 전남 동부지역에서만 천여 명이 넘었다.

이번에 시가 의욕적으로 실시하는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이 과연 이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단초가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문의 : 공보담당관실 노창명(690-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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