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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한류가 시작되다

  • 기자명 박람회조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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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세계박람회, 당시 자료원문 공개…BIE 사무총장 자료기증

   ‘원색으로 칠 되고 극동의 미를 살려 가장자리가 살짝 들린 큰 지붕을 덮은 이 순수 목재건물의 매력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2012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동석, 이하 조직위)가 우리나라가 세계박람회에 한국관을 건설해 최초로 참가한 1900년 파리박람회 자료와 사진을 입수하고 최근 이를 공개했다.
   조직위가 공개한 자료는 1900년 프랑스 ‘프티 주르날’에 실린 한국관 관련 기사로 최근 방한한 로세르탈레스 국제박람회기구(BIE) 사무총장이 여수세계박람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하며 조직위에 기증한 것이다.
   당시 한국관에는 실내복, 관복 등 의복, 부채, 담뱃대, 머리띠 등장신구, 나전칠기, 병풍 등 가구, 생강 분쇄기, 농경기구 등이 전시됐으며, 불경과 팔만대장경, 삼국사기 등 목판인쇄물을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기사자료에는 공식책자에서 볼 수 없는 당시의 평가도 담겨있어 우리 전시물이 당시 관람객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도 유추할 수 있게 안내한다.
   ‘프티 주르날’은 당시 한국관 전시물이 “국왕이 직접 보내온 값진 수집품들과 한국에 거주했던 프랑스인 소유의 소품들, 그리고 한국산 제품들이 세련되게 배치돼 있어 한국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고 평가했다.
또 ‘가려움증용 빗’이라고 소개한 참빗에 대해 “너무 긁으면 괴로울 게 분명하다”라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물건을 재미있게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며 박람회에 참가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1900년 파리를 마지막으로 한 동안 일제 강점으로 엑스포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1962년 시애틀 박람회를 시작으로 다시 한국관을 설치하고 참여해왔으며, 1993년 박람회 참가 100주년을 기념해 개발도상국으로는 처음으로 대전박람회를 개최했다.
   한국이 두 번째로 개최하는 2012여수세계박람회는 100개국, 800만 관람객이 참가한 가운데 오는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93일간 여수 신항 지역에서 열린다. 
   1900년 당시 프랑스 ‘프티 주르날’에 실린 한국관 모습과 관련 기사.
   ※ 첨부 : ‘프티 주르날’ 번역본.
   몇년 전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한국은 표면적 218,000km의 반도에 1천200만~1천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독립국이다.
국왕이 전시회 참가를 허가한 것으로 보아 러시아, 일본과 밀접한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마침내 진보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한 것 같다.
쉬프렌 대로(avenue de Suffren) 토목공학관 오른쪽에 있는 한국관은 뛰어난 건축가 페레(Ferret)씨가 설계를 맡았다. 원색으로 칠 되고 극동의 미를 살려 가장가리가 살짝 들린 큰 지붕을 덮은 이 순수 목재건물의 매력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내부장식은 옛 궁전의 회견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은 실크 깃발로 덮여 있는데, 그중 일부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주보고 있는 두 벽보에는 찡그린 가면과 연극 장신구가 새겨져 있다.
진열대에는 국왕이 직접 보내온 값진 수집품들과 한국에 거주헀던 프랑스인 소유의 소품들, 그리고 한국산 제품들이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어 한국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진열대 가장자리에는 쌀, 밀, 옥수수, 메밀, 특히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는 콩 등 각종 곡류가 병에 담겨 있다.
한국인의 식생활은 중국인보다 다채롭다. 극동지방 어디나 그렇듯 밥을 주식으로 하는데, 북쪽지방에서는 메밀죽이 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과일을 즐겨 먹으며 특히 오이, 사과, 자두, 귤, 무우, 배추, 감자를 좋아한다. 조류와 산짐승류는 거의 먹지 않고 돼지고기와 소고기 구운 것을 먹는다. 개고기는 환자들에게 국으로 대접한다. 모든 음식을 아주 맵게 먹으며 참기름, 채종유, 아주까리 기름으로 요리한다.
음료로는 쌀 끓인 물을 가장 흔히 볼 수 있다. 차는 거의 마시지 않고 일종의 쌀맥주를 즐겨 마신다.
신기하게도 한국인은 동물의 우유를 절대 마시지 않고 소에서 우유를 짤 줄 모른다.
농산물 옆에는 용도가 다양한 바다거북 껍질과 소뿔이 전시되어 있다. 가공된 가죽과 철광석, 화려한 대리석도 눈에 띄는데, 불행히도 이러한 풍부한 자원들은 개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직물로는 가볍고 아름다운 원색 견직물, 면·마직물이 있고, 의상이 아주 잘 전시되어 있다. 사진에 나온 실내복이나 화려한 관복 외에 금·은사로 수놓은 견직예복도 있다. 민중, 어린이, 여인네 의상을 입은 마네킹도 곳곳에 보인다. 한켠에는 고위관리가 높은 가마에 않아 방문객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이 가마는 샤를르 알레벡(Charles Alevêque)씨가 기메(Guimet)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의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모자이다. 원추형의 이 모자(갓)는 12~15cm 높이에 가장가리가 넓게 나 있어 쪽진 머리를 감싸며,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은 끈을 목 아래서 매어 고정시킨다. 밖에서는 이 모자를 절대 벗지 않는 반면, 다른 사람과 대화 시 벗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
의복은 면직 또는 견직을 소재로 하며, 검은 색 모자와 대조를 이루는 밝은 색상을 띤다. 남자는 어깨가 꽉 조이고 소매가 풍성한 저고리를 입고, 아주 풍성한 바지 밑을 각반에 넣어 조여 맨다.
셔츠 같은 건 없다. 부유층은 이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외투(두루마기)를 걸친다. 의복에는 주머니나 단추, 단추구멍같은 게 일체 없고 끈으로 맨다. 여자는 남자처럼 풍성한 바지 위에 치마, 저고리, 가운같은 긴 드레스를 입는데, 외출 시에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모자 달린 외투(쓰개)를 걸친다. 천, 가죽, 한지, 짚으로 만든 신발 외에 굽이 높은 기이한 형상의 나막신도 있다.
일본인처럼 집안에서는 디딤목에 신발을 벗어둔다. 남성복에서 뺄 수 없는 장신구로는 허리춤에 차는 복주머니, 칼, 담배통, 그리고 작은 양산, 부채, 특히 담뱃대가 여러 종류 있다. 담뱃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그 길이가 길며, 대나무관과 반구형 금속화로로 이루어져 있다. 아편대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한국에서는 이런 마약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끝쪽 진열대에는 무기, 단검, 군도, 한때 사형집행용으로 쓰였던 화살 및 등자가 신기한 화려한 마구가 놓여 있다.
머리띠, 보석, 목걸이, 부적, 브로치, 수많은 종류의 빗 등 장신구도 보인다. ‘가려움증용 빗’이라고 표시된 빗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너무 긁으면 괴로울 게 분명하다. 또다른 진열대는 아름다운 도자기로 가득 차 있다. 전통을 믿는다면 극동에서 도자기를 발명한 것은 한국인이다.
악기 중에는 클라리넷과 코넷을 합쳐 놓은 듯한 아주 기이한 악기가 눈에 띈다.
늑대털로 만든 붓이 국가 핵심산업인 제지산업을 가리키고 있다. 이 두꺼운 종이(한지)는 그 용도가 아주 다양하다.
과거 찬란했던 한국 미술은 오늘날 청동구리 장식된 함과 가구 제작에 국한된다. 장식된 함과 나전칠기, 중국식 상아가구, 그림병풍, 놀라운 거실 초롱불이 가구 전시의 주를 이룬다.
종교, 의상에 관한 문헌인 성전과 묘비, 15세기 초의 향료, 혼수를 받기 위한 의자, 결혼 상징물, 화병, 그리고 부처남께 바치는 쌀, 채소, 과일용 제사상도 있다.
대리석 등으로 조각된 화병과 함, 12개 그릇으로 구성된 1인용 상차림, 납작한 어린이용 숫가락, 생강 분쇄기, 여행용 컵, 화로, 과거와 현재의 은·청동 동전, 우표, 농경기구, 바구니, 주방용구(삼발이, 솥, 국자, 자물쇠, 톱, 다리미 등)도 보인다.
서적 진열대는 아주 잘되어 있다. 한국의 목판 인쇄술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9세기부터 서적이 널리 배포되기 시작했다.
1056년 문종은 9경을 비롯하여 철학, 역사, 문학, 의학, 천문학, 산수학, 지리학 서적들을 인쇄하여 하여 각 저서마다 한 본씩을 전국의 서당에 보내게 했다.
오늘날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국 서적은 1317~1324년판 공자의 논어이다. 진열대 한가운데에는 불경(1361)과 팔만대장경(1368)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삼국사기(1644), 수많은 판화를 담은 3개 국어(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일본어)서 신비수업, 부처가 효도를 가르치는 성서, 민중달력, 양잠업 삽화책, 주술집 등에 주목할 만하다.
한국 언론은 프랑스보다 더 오래되어 15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매일 길이가 다른 수사본 한 장짜리 서울 가제트가 유일한 신문이어서 언론이라 하기엔 조금 과장된 면이 있지만, 왕령과 그 일자, 제사의 종류 등이 실렸다. 1894년부터는 이동식 납활자로 인쇄되었다. 수차례의 시도 끝에 또 다른 신문인 독립신문이 살아남아 한 페이지는 영어로, 세 페이지는 한글로 편찬되었다.
순수미술로는 한지에 그려진 그림과 수채화가 있다. 매년 1월 15일을 맞아 돌 던지기와 곤봉으로 하는 싸움의 일종인 Hypensam 놀이가 그려진 작은 그림이 눈에 띈다. 새, 물고기, 호랑이, 줄낚시, 밭일 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18세기 말 서울 왕궁에서 제작된 수사본 48서도 전시되어 있는데, Syon-ouen 성곽 완공때 거행되었던 의식을 그린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우리 번화가처럼 전차가 다니는 서울시의 사진도 보인다. 각 부처 간은 전화로 연결된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뒤섞인 모습이다. F. Faideau(페도)

*** 문의 : 박람회조직위 홍보과 손혁기 02-740-4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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