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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1019 유적지를 다녀오다

  • 기자명 박미영 기자 (indogo@naver.com)
  • 조회수 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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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여순1019가 일어난지 72주기가 되는 해이다. 해마다 그들을 기억해야겠지만 올해는 특별하게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그 답사지를 다녀왔다.

답사지를 돌면서 우리지역에서 일어난 아픈 사건의 현장을 되새기게 되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기억하고 알아가야 할 것이다.

여순1019는 왜 일어나게됐을까?

국방경비대는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1대 대대병력을 신월동 805번지에 14연대를 창설한다.
그 목적은 제주43 진압이였다. 하지만 14연대는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1948년 10월 19일 '동족상잔 결사 반대' 애국민에게 호소함을 발표한다.
여수와 순천 전남 동부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여순1019의 시작이다.

14연대는 여수를 점령한 뒤 제일 먼저 인민위원회를 읍사무소에 설치, 여수의 도심지인 중앙동 일대에 인민대회를 알리는 붙이고 인민대회를 연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한 진압군은 현재의 여수중앙초등학교 당시에는 여수종산초등학교 뒤편의 여수여자중학교에서 주둔하며 이곳에서 부역자를 색출하고 민간인을 학살한다.
손가락총에 의해 가리킨 사람들은 권총으로 단도로 죽임을 당했다.
만흥동에 위치한 만성리 형제묘에는 끌려와 암매장 당한 사람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로 하나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5명씩 총살하여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더미 5개, 125명", 진압군은 1948년 11월 초순부터 잡아온 사람들을 이 골짜기 속으로 몰아 넣어 학살하고 흙과 돌로 암매장했다.
이들의 억울함은 여수사건 희생자 위령비 뒤편의 ... 말줄임표로도 잘 나타나 있다. 할말은 많은데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여순1019의 유족을 만나면서 그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여순1019 특별법 제정을 염원해 본다.

 

 

https://youtu.be/eq1IGgQVg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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