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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배우는 이순신 장군의 효(孝)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배우는 이순신 장군의 효(孝)
  • 방길자
  • 승인 2020.09.23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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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2323승의 신화를 써내려간 충무공의 무용담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구국(救國)의 성지(聖地)’ 여수! 구국의 영웅 이순신!으로 우리 가슴에 남게 된 계기는 1591213일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여수의 본영에 부임하면서 부터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무인으로서 위난의 나라를 구한 충신이자 효성이 지극한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전쟁터에서 쓴 '난중일기'에는 7년 동안 100여 회에 걸쳐 어머니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모습이 나온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충()을 실천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인 국보 제304호 진남관이라면 여수문화유산 제1호인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은 충무공이 효()를 실천한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만에 찾은 충무공자당기거지는 그사이에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유적지 입구에 세워진 거북선모양의 비에는 난중일기 서체와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고음천은 현재의 지명인웅천을 말하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웅천이라 쓰고 곰챙이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1594) 111.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피난 와 계신) 어머님을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곧바로 고음천에 대었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같이 가서 어머님을 뵈었다.

기운은 없으셨으나 말씀은 또록또록 하셨다.

적을 토벌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1594) 112. 맑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시며

이별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불편한 것 같아서 곧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난중일기>에서-

사주문을 들어서면 노거수 군락아래 본채와 사랑채가 보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모친인 초계변씨(草溪卞氏),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가솔들이 기거하며 5(1593~1597)동안 피란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송현마을이 택지개발로 이주하면서 옛터 그 자리에 2015년 신축한 건물입니다.

본채는 정면 5, 측면 3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 관리실, 사주문, 협문, 토석담장, 생활용품 등의 전시되어 있습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이 이듬해 왜란이 발생하자 모친을 걱정해 오던 차에, 휘하의 군관 정대수 장군이 편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임을 알고는 이곳으로 어머니를 모셔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고 합니다.

장군은 전장에서 얼마간 어머니의 안부를 듣지 못할 때에는 무척 애를 태웠고, 본영(여수)에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뵙고 손수 진지를 차려드리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장군의 어머니 변씨는 충무공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때 조정에 탄원을 올리기 위해 노령의 불편한 몸임에도 배를 타고 아산으로 가다가 배에서 생을 마칩니다.

장군의 어머니께서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택지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몇 년 전까지 400여년을 충정공 정대수 장군의 후손들이 14대까지 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마당 장독대 뒤편에는 이충무공모부인초계변씨유적비가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 "이충무공모부인초계변씨유적비(李忠武公母夫人草溪卞氏遺蹟碑)"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수는 발길 닿는 곳마다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적, 유물, 지명 등이 널려있는 임란 구국의 도시입니다.

오늘은 많은 유적 중에서도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느끼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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