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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 묘도여행(온동마을)

  • 기자명 방수윤 (suyun7762@naver.com)
  • 조회수 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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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1591(선조 24)에 온돌 또는 온돌포(구들방)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구들방이라고 부른 이유는 한옥의 방 만들 때 난방을 위해 쓰이는 구들돌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된 구들돌이 인근지역에 공급됨으로써 구들방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한 기름머리(유두) 해변은 넓고 얇은 갯바위가 넓게 분포해 있다. 산업화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구들장 생산지였다.

온동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초등학교가 폐교되어 마을 복지센터로 쓰이고, 방앗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을 슈퍼&횟집이 생기고 선창에 어선들이 사라진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마을 앞에 서면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눈앞에 보이고 왼쪽의 여수광양항이 있다. 근처를 쉴 틈없이 지나가는 대형 선박들이 보인다.

묘도의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이 온동마을의 끝자락의 지명이 유두이다. 말 그대로 기름머리이다. 그래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석유가 나올 것이라며 탐사 작업을 했지만 허사였단다. 기름은 안나지만 기름머리 앞바다는 GS칼텍스의 원유 부두가 설치돼 대형 유조선이 정박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진의 끝에 보이는 기름머리 뒤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는 온동산성이 있다. 온동산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제독으로 알려진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 전적지이다.

관음포 전투는 1383년 고려의 정지가 이끄는 고려 수군이 이곳 기름머리 앞바다에서 왜구를 화포를 이용하여 격퇴한 전투이다.

그리고 215년 뒤에 왜구들은 똑같은 곳에서 섬멸 당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이자 이순신 장군이 생을 마감한 노량해전이 펼쳐진 구국의 바다가 바로 이곳이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 측 함대는 500여 척에 달했다. 명나라 수군 300여 척과 조선수군 80여 척이 함께 뒤엉켜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7년의 왜란을 갈무리한 것이다.

그 정신 그대로 이어져 온동마을은 365일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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