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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평초에 새겨진 친일잔재의 역사와 청산을 위한 노력
미평초에 새겨진 친일잔재의 역사와 청산을 위한 노력
  • 방길자
  • 승인 2020.06.18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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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그런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미평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미평학교 설립자 김영준 기념비를 지날 때면 늘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천일고무 김영준 사장이 일제강점기에 여수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부자였지만,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기념비 옆에 김영준의 친일 행적을 담은 안내문이 설치되었다.

전라남도교육청이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기리고 역사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전남지역 초··고등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안내문을 설치했다.

여수 미평초 앞에 있는 김영준 기념비는 김영준이 일제강점기인 1939년 미평에 5만 원 상당의 부지를 기부해 학교를 설립한 것을 기념하고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세웠다. 김영준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 군용기를 헌납하고 전쟁 자금을 기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은 친일 인물이다. 김영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 기념비는 1952(단기 4285)년 미평, 만흥, 둔덕, 오천, 문수, 여서, 7개마을 주민들이 미평학교 설립자 김영준(1900~1948)사장의 육영정신과 훌륭한 기부문화 정신을 기리어 아름다운 시민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념비의 위치가 도로보다 낮고 담장 안에 있어 20066월 여수시 지원으로 재 조성 하였습니다.

 

             전남 학교 내 친일 잔재 청산 제 4

일제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 협력자

여수미평초등학교 설립자 김영준

이 비는 여수미평초등학교 설립 공로자인 김영준(1900~1948)의 공덕을 기리고자, 미평, 둔덕 등 7개마을 주민과 학교 후원회 등이 주도하여 1952년에 세운 것이다. 그 후 도시 발전 과정에서 2006년에 지금의 위치에 옮기면서 안내문과 함께 소공원으로 조성 되었다. 김영준은 여수미평초등학교의 설립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나, 1940년을 전후하여 여수 김영준호라는 군용기 헌납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는 등 일제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협력한 인물이다.

*1938년 조선방공협회 전라남도여수지부 평의원

*1940년 광주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1941년 전라남도 도회의원(여수읍)

*1941년 방공통신용 경찰전용전화가설비 1만원 헌납 공로로 이듬해에 감수포장을 받음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941여수 김영준호라는 군용기 구입을 위해 10만여 원을 헌납하기로 결정한 후 이듬해에 53천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냈다.

김영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 협력자 김영준의 잘못을 밝힌다.

2019. 12

전라남도교육청

역사를 돌이켜보면 부역자들은 언제 어느 때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대표적이다.

친일의 범주는 쉽게 정하기 어렵지만 일본에게 자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충성을 바치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사적 이익을 취한 사람들이 친일파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로부터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파나 그 자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자손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김영준기념비앞에서 공과(功過)가 새겨진 안내문을 읽으면서 늦었지만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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