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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현성'의 가을풍경

  • 기자명 방길자 (cys2651@naver.com)
  • 조회수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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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현성(여수석보)의 아침 풍경입니다

주춧돌은 수풀에 묻히고 성안 분지에는 억새풀이 꽃을 피워 바람에 한들거립니다.

역사를 잊는 성터에는 아침안개가 가득 고여 있습니다.

여수석보로 알려진 이곳은 조선 1397(태조 5) 이전까지는 여수의 오래된 행정치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수의 마지막 현령 오흔인은 끝내 불사이군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1397(태조 5) 태조는 여수를 반역향으로 지목하고 여수현을 폐하여 순천부에 예속시켜 버립니다.

여수의 혼이 서려있던 현성은 폐현이후 석보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석창성(여수현성)은 일제 강점기까지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 되었는데 국도 17호선 개설공사 때 이곳 성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성돌을 뜯어내는 과정에서 성돌에 새긴 석공의 이름 중에는 제주에서 왔다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고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안에는 약 10여 가구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중에는 사람 뼈가 나온 집터라 흉사가 계속 된다는 집도 있었고, 동학혁명 때는 성안에서 많은 사람이 많이 죽어 비올 때면 이곳에 도깨비불이 나타난다는 이야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가면 등골이 오싹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의해서 기록됩니다.

여수현성의 찬란했던 과거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지고 여수석보로서의 기록만 전해져 옵니다.

사람이 죽으면 비석에 관직을 쓰는데 일생을 살면서 가장 높은 관직명을 기록합니다. 진사에서 시작해 판서가 되면 비석에는 판서공00’라고 새깁니다. ‘진사공00’라고 쓴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현성석보라고 복원하는 것은 판서를 진사라고 비석에 새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곳 성터가 여수석보가 아닌 여수현성으로 복원되어 여수의 자존심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쉽지는 않지만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지워진 여수의 역사를 찾아내는 고증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여수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한 범시민적 노력과 행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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