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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 손양원 목사 순교지를 지나며

  • 기자명 방수윤 (suyun7762@naver.com)
  • 조회수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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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
신사 참배 반대하며 6년 옥고

둔덕동 정수장아래 손양원목사 순교지, 순교 당시에는 과수원 이었다
둔덕동 정수장아래 손양원목사 순교지, 순교 당시에는 과수원 이었다

산돌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1939714일에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세워진 애양원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다. 1940925,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재판과정에서 1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애양원 교회를 찾아 한센인들과 함께 했다.

순교지 바로 아래에는 산돌 손양원 목사의 추모비 세워져 있다
순교지 바로 아래에는 산돌 손양원 목사의 추모비 세워져 있고 추모비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19481025,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애양원을 떠나지 않았고 19509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928일 저녁11시 여수 시 둔덕 정수장 아래에서 총살당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로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존경 받고 있다.

여수새중앙교회 옆에 세워진 순교비의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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