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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물들었던 우리나라

  • 기자명 김가람 (karam2601@hanmail.net)
  • 조회수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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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은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고,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며 남녀노소 신분 차별 없이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날이다.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외쳤던 그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3.1절은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올해 2019년, 1919년 3월 1일 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100주년을 맞이하여 여수시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형숙 열사 묘소에서는 '3.1혁명 100주년 여수지역 독립운동 기념식'이 진행된다.

기념식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인 이문봉 여수참여연대 대표가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여수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인 윤형숙, 윤자환 열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윤형숙 열사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출생하여 광주 수피아여학교(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거행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일본 헌병대는 실탄 사격을 감행하였으며, 선두에 섰던 윤형숙의 오른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팔이 잘린 그녀는 잠시 쓰러졌다 일어나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쳤고,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이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당시 중상을 당한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윤형숙 열사의 무덤에 있는 비에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 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라고 남겨져 있다. 생을 마감하면서도 나라만을 걱정했던 윤형숙 열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윤자환 열사는 전남 여수에서 출생하였다.

천도교 신자였던 윤자환은 1919년 3월 2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의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 35매를 배포하고, 순천군 해룡면 면사무소와 여수경찰서 게시판에도 독립선언서를 붙여놓았다.

또 여수군 율촌면에 사는 강석재에게도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만세를 불렀던 우리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2019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네는 주권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3.1절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중앙동 이순신광장에서는 시민문화제가 열리며, 여수 우도 풍물 굿 보존회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독립 열사를 기억하는 진혼굿과 독립선언서 낭독이 준비되어 있다.  

3.1운동 100주년
3.1운동 100주년

마지막으로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만든 엠블럼(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지)을 보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우리네의 노력이 필요하겠다.

윤형숙, 윤자환 열사이야기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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