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0일부터 31일,
여수시민사회가 마련한 故김복동 할머니 추모 분향소
지난 달 31일 중앙동 평화의 광장 故김복동할머니 추모제에 다녀왔다.
낮부터 눈발이 무섭게 날리고 저녁이 되자 영하로 떨어진 매서운 추위였다. 이날 필자는 교통안전 봉사를 위해 1시간 전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2년 전 여수시민의 힘으로 마련된 평화의 소녀상은 언제 봐도 안쓰럽다.
고인을 닮았다는 소녀상, 싸라기눈이 녹아 차가운 눈물이 맺힌 듯 흥건해 보여 닦아 주었다.
얇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두 손도 가만히 잡아봤다.
뒷꿈치를 들고 있는 불안한 맨발 앞에 춥다고 불평했던 필자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故 김복동 할머니 명복을 빕니다
덩그란히 세워진 천막부스 안, 고인의 영정사진과 전남여성인권지원센터 이름으로 꽃바구니가 진열돼 있었다.
필자가 속한 동아리 단체가 추모와 꽃 한송이를 바쳤다.
세계여성의 날,
일본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전쟁 피해 여성에게 후원하겠다. ‘나비기금’창설( 2013년)
고인의 인권운동은 1992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 년 발족) 간사와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1993년 세계인권위원대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해 전쟁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과 인권유린을 세계에 전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재일조선학교를 위한 지원 등 적극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저녁 7시, 추모제가 시작되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무대 위에 마련된 작은 영상 매체에서 고인의 육성과 비디오가 되풀이 됐다.
80여 명의 사람들이 바람을 맞으며 촛불을 켰다. 고인을 추모하는 노래와 발언이 이어졌다.
김진수 시인은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과거와 똑같은 아픔을 겪게 된다’ 며 자작시 ‘가역불가역’을 낭송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제창을 권했다.
‘피해자가 인정할 수 없는 합의는 있을 수 없다’
필자의 기억 속에 고인은 수요집회(일본군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집회)가 열리는 현장 뉴스에서 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27년째 이어진 집회는 고인의 기력이 다 할 때까지 참여했으니, 최장 참여자일 것이다.
지금껏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1372회가 열렸다.
우리는 흔히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이유를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 국력과 잦은 내분 탓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 뿐일까?
평생 외롭고 고단한 여생을 살다간 이의 추모제,
비록 눈발 날린 추위였지만 참여자가 적어 못내 아쉬웠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통곡의 벽)
한편, 1일 일본대사관을 거치는 노제를 끝으로 고인의 영결식은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