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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현성 복원으로 시민 자긍심 높여야

  • 기자명 방수윤 (suyun7762@naver.com)
  • 조회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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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제523호, 여수석보
여수현성으로 복원, 시민 뜻 모아야

△ 여수석보가 발굴을 마치고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여수시 여천동에 위치한 석창은 조선시대 여수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관리하던 석보(돌로 쌓은 작은 성)가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동안 '석창성지(石倉城址)'로 불리다가 1987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고, 2012년 사적 제523호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명칭인 여수석보로 통일되었다.

여수석보는 삼국시대 백제의 원촌현과 통일신라시대 해읍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수 지역의 치소였을 것으로 추정 되지만 1396(태조5) 여수현령 오흔인이 이성계의 쿠데타에 불복하였다 하여 폐현 된 이후, 석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총 둘레는 474m이며, 너비는 최고 11m 정도이다. 관련 시설로는 문지 1개소, 추정 건물지 4개소가 확인된다.

성 안에서 발견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가 대부분이며, 자기가 1점 발견되었다. 다량의 기와는 성의 북쪽과 동쪽 평탄지에서 발굴되었으며, 제작 시기는 백제시대로 추정된다.

여수는 오랫동안 왜침을 받으면서 묘도 앞바다에서 2천명이 넘는 왜구들을 수장시킨 정지장군의 관음포 전투지였고, 왜란 때는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본거지였다.

우직하도록 의협심이 강하고 의리가 강했던 여수의 선조들은 그것 때문에 언제나 손해를 보았다. 고려에 끝까지 항거한 후백제의 김총 장군으로 인해 고려 때는 여수지역의 일부에 소, 부곡이 설치되었다. 이성계의 쿠데타에 끝까지 항거한 여수현령 오흔인 때문에 여수현이 폐현되고 순천으로 편입되었다.

20여 년 전 까지만 하여도 석창석보에는 성내(성안)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석창성 복원을 이유로 성내 마을을 이주시키고 주변 토지까지가 수용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여수도 한시바삐 시민들의 뜻을 모아, 여수현성을 복원하고 여수의 굳센 기개와 구국의 정신을 스토리텔링하여 여수시민의 자긍심을 살려야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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