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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를 떠나 완도에서 시(詩)들을 데리고 오다
여수를 떠나 완도에서 시(詩)들을 데리고 오다
  • 이기자 기자
  • 승인 2018.01.29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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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시인과 조촐하고도 반가운 만남

<바다가 우려낸 작은 풍경들> 김성률 시집을 펼친다. 오랜만의 만남이 준 예감처럼 담담하고 서정적인 시들이 실려 있다. 시집의 제목에서 ‘우려낸’이라는 표현에 생각이 머문다. 우려낸다는 것은 ‘물체를 액체에 담가 성분, 맛, 빛깔 따위가 배어들게 하다. 생각이나 감정을 끄집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보통은 떫고 쓴맛을 빼내는 작업을 생각한다. 완도에서 시인은 쪽빛이 튀겨서 쪽빛에 물들고 그 쪽빛에 스며들어 어쩌면 이미 쪽빛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완도에서의 삶이 그런 듯하다. 그가 데려온 시들이 그렇다. 지난 1월 24일 수요일 노을 시간에 소호동 태백산맥에서 옛 독서회 지인들과 김성률 시인이 만났다. 조촐하게 마련된 사인회 겸 축하의 자리였다. 여수를 떠난 후 완도의 삶이 궁금했으나 따로 묻지 않았다. 순도 높은 쪽빛의 시선으로 쓴 그의 시들이 그걸 알려줄 거니까. 떠나간 곳 여수를 표현한 시가 궁금해서 먼저 읽는다.

   오동도에서
                       김성률

동백꽃 짙어질 때, 오동도에서
춘정을 품지 않고 거닐다 가면
여행은 본전 생각날 헛일이겠다
혹 곁에 가던 그이가
은밀한 손을 스치지 않거든
쑥스러움 속이고서
먼저라도 팔짱을 껴 보아라
봄마저 우울증을 앓는 것은 죄짓는 일
동백꽃 밑에서는 그저 사랑하라,
어쩌다간 시인처럼 깊이 빠지고
화폭 속 여인처럼 농염해도 좋겠다
한번쯤 붉게 피어난다고
무어 그리 따질 일인가?
마음이 움직인다면
하늘빛 받아 바다가 되어도 좋을 일이다
오동도에선

 

△9월의 여수, 봄하늘 「바다가 우려낸 풍경 」 중에서 ⓒ이기자
△9월의 여수, 봄하늘 「바다가 우려낸 풍경 」 중에서 ⓒ이기자

우연찮게 왔던 곳에서 돌아갈 길을 잊기로 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생각지 말기로 했다. 그 이유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나자 완도는 '아무것도'를 넘는 그 무엇이 되어주었다. 서문의 표현처럼 그 무엇들이, 반짝이는 글로 승화되기를 또 기다린다.

   3월의 눈
                       김성률

눈이 내립니다

하얗게 날리다가 비처럼 떨어지는 3월의 눈
속에 온기가 가득한 탓이겠죠

사람도 그럴 테죠
온기 많은 사람은 늘 촉촉한가 봅니다

당신도 그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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