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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매영답사회 4월 문화유적답사

  • 기자명 이기자 기자 (leegija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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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지역 근현대사 유적지를 돌아보다

2017. 04. 22(토)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부설 매영답사회는 4월 답사지로 목포지역을 선택했다. 목포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최고의 군사도시였다. 조대형 문화해설사는 목포의 근현대사 유적지를 속속들이 소개하면서 훌륭한 해설과 함께 굉장히 의미있는 하루를 선사했다.

가장 먼저 목포 신항만으로 가서 인양된 세월호를 확인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리본의 물결과 미수습자 9명의 사진을 보면서 그 비통함은 헤아릴 수 없었다. 울컥울컥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켜야만 했다. 왜 이런 참사를 불러와야만 했는지 '사람들의 잘못'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을 뒤로하고 고하도로 향한다. 목포 유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길게 용의 모양으로 늘어선 섬이 있다. 목포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섬에서 본 유적지로는 1904년 미국 육지면의 시험재배 성공을 기념해 세운 '조선육지면발상지지'라는 기념비이다. 면화재배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사자본을 구축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목포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방공호가 약 40여 개 정도 있다. 고하도에서 첫 방공호를 본 후, 충무공 이순신의 유허비가 봉안된 모충각으로 향했다. 유허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의 행적이 적혀 있다.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 수군의 본진을 이곳 고하도로 옮긴다. 다시 고금도로 옮겨갈 때까지 108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수군을 보충하고 전선을 건조하는 등 전열을 크게 정비했던 곳이다.

점심 후 유달산권으로 향한다. 노적봉과 목포근대역사관(구 일본 영사관), 방공호, 국도 1, 2호선기점기념비, 이훈동정원, 동본원사(최초 일본식 불교사찰)까지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었으나 조대형 해설사의 열정적인 진행으로 계획했던 것보다 넘치게 잘 보냈다. 한 사람의 해설사를 통해서 목포 시민의 위상을 본 듯 그의 태도는 본받을 만 했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높이로 솟아오른 커다란 바위 봉우리이다. 임란 때 이순신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을 본 왜적들은 '군량미가 이 정도라면 군사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큰 두려움을 느끼고 멀리 도망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때부터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목포근대역사관을 돌아보고 내려오니 역사관 건물 앞에 정신대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구 일본 영사관 건물 앞에 소녀상이라... 아주 적절한 장소라는 생각과 함께 의미가 남다르다. 소녀상 옆의 빈 의자에 가만히 앉아본다. 소녀의 손이 차가워보여 따뜻하게 잡아본다.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으로 그득해진다.

불현듯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소년, 소녀들 그리고 비참한 나라의 짐을 짊어지느라 몸과 영혼을 유린당한 정신대 소녀들... 이들의 억울한 '한'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의 영혼의 안식을 구원할 것인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역사를 바로 알아 가는 것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라고 한다.

과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역량이 우리에게 키워지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해보는 이번 목포 문화유산 답사다.

(위) 목포 조대형 문화해설사가 미국 육지면 시험재배 성공지에서 열정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고하도 모충각(가운데 좌), 구 일본 영사관이었던 목포근대역사관(가운데 중앙과 우)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매영답사회 회원들. (아래)소녀상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답사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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