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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다시보는 난중일기 - 여수를 중심으로

  • 기자명 김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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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곶목장(白也串牧場)과 감목관(監牧官)
   -  <임진 3월> 21일(임오) : 맑음
   -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감목관이 와서 잤다.

감목관은 백야곶목장 감목관으로 당시 감목관은 조정(趙玎)이었다.
조선시대 백야곶목장은 현 화양면 일대에 존재했었는데, 설치시기는 대략 세종 16년(1434) 이전으로 태종 7년(1407)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다.
이 목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마를 지원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목장에 종사하는 모든 인력들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초석이 되었다. 그 예로 충무공은 장계(狀啓)에“순천감목관 조정은 비분강개하여 자력으로 배를 준비하고 종과 목자를 거느리고 자원 출전하여 왜인을 많이 쏘아 죽이고 왜의 물건도 많이 노획해 왔다”라고 쓰고 있다.
이 목장은 임진왜란의 후유증과 함께 정부의 송금정책으로 인해 목양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신증승평지'가 편찬된 영조 5년(1729) 이전에서 가까운 시기부터였다. 백야곶목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장의 명호가 곡화(曲華)로 바뀌었다. 지금도 노인들은 화양면을 코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곡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목장은 동학농민운동 때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며, 고종 32년(1895)에 드디어 폐장되어 이곳에 방목되었던 말은 궁내부에서 관원을 파견시켜 방매 처리하였다. 곡화목장의 둘레는 대략 110여리 정도이고 넓이는 동서 20리, 남북 30리 정도였다. 곡화목장의 마필 수는 많을 때는 1000여 마리가 넘었다. 곡화목장에는 외동헌 1채, 환곡·조세창고 등 4채, 마구 2채, 누각 1채, 마신당 3채, 각색청 5채, 피우실가가 3채 등과 이와 관련된 부대시설 등을 아울러 총 38 곳의 공청이 존재했었다. 한편 이 목장에는 목장성이 존재했었는데, 그 유구는 현재 소호동 소제마을부터 소라면 관기마을까지 약 3㎞에 걸쳐서 거의 일직선상으로 남아있다. 화양면 창무의 문꾸지는 목장의 정문인 곡화목장분계성의 어목문(禦牧門)이 이었던 곳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김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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